본문/내용
최하림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는 고요의 시집이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고요는 사전적 정의와 무관하다. 이 시집의 고요는 소리없음, 즉 적막을 뜻하지 않는다. 소리를 배척하지 않는 고요, 오히려 시끄러운 고요다. 이제 고요는 죽음과 침묵의 상태나 영역이 아니라 눈부시게, 소란스럽게 생성하고 소멸하는 뭇 생명들이 빚어내는 소리의 한가운데이거나 그 틈새에서 살아 있다. 인간과 기계가 개입되었을 때 발생하는 소음은 고요와 적대적 관계이지만, 자연의 소리와 고요와의 관계는 우호적이다. 소리와 고요는 서로 삼투한다.
바람이 별로 없건만
두륜산 속길에는 가랑잎이
뚝뚝 떨어져내려 길을 덮는다
고요도 이 시간에는 멈추지 않고
흘러 두더지처럼 흙을 갈고 다닌다
오리나무 가지들이 하늘 높이 오르고
늙은 비구니가 발소리 죽이며 암자로 간다
가을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고 나는
속으로 들어가 쿨쿨 잠자려고 한다
「나는 꿈꾸려고 한다」 전문이다. 여백이 많은 동양화 같은 시. 이 완벽한 액자의 그 여백에는 시간과 소리가 가득하다. 바람, 하늘, 땅속, 상승과 하강, 수평과 수직…… 길지 않은 시지만 다양한 이미지들이 교차하고 있다. 이 시의 전반부를 지휘하는 시어는 ‘고요’다. 가랑잎은 인간의 길을 덮고, 대신 자연(두더지)이 흙 속으로 제 길을 낸다. 늙은 비구니는 ‘발소리를 죽이며’ 자연의 고요에 참여하면서 인간에서 벗어나 있다. 이 시에는 두 개의 액자가 있다. 액자 속의 액자. 큰 액자가 가을 속으로 들어가려는 ‘나’가 속해 있는 액자이고, 작은 액자는 1행부터 7행까지가 들어가 있는 액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