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 발빠른 정보화 시대에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한 편의 소설이 출간되었다. 이건 일종의 시대의 거역? 혹은 인간의 반시대적 고찰 같은 것인가? 우리 문학이 언제부터인가 현실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시달리게 되면서 상상력은 고갈되고 인간과 예술 사이의 미적 질서가 무시되기 시작했다. 상상력의 미학이 고갈되면서 대중사회의 중심에 자리잡는 것이 헐리우드식 구성법이다.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절대적 의미는 밀려나고 상대주의적 행동만 남는다. 단순 명쾌한 행위와 사건의 충돌이 엮어내는 서술구조. 이런 단선적 구성력이 우리 소설과 영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우리는 지금 문학의 죽음을 맞이한다. 스펙터클 영웅전, 미스터리 스릴러, 자잘한 일상사의 신변잡기류가 무제한 방출되는 시대. 그래서 가볍게 읽고 버릴 수 있는 일회용 소설들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정찬의 글쓰기는 결국 ‘세상의 저녁’일 수밖에 없는 지 모른다. 가벼운 볼거리 읽을거리들이 휩쓸고 지나간 저녁시간. 잠들지 못하는 영혼들이 비로소 불을 밝히고 삶의 미궁 속을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정찬의 소설은 그렇게 읽힌다.
정찬의 『세상의 저녁』은 일종의 액자소설 구조로 짜여 있다. 물론, 저 유명한 액자소설 테오도르 슈토름의 「백마의 기사」나 이청준의 「소문의 벽」 등과 같은 액자소설의 전형적 얼개와는 구별된다. 일종의 해설자라 할 수 있는 일인칭 부인물 시점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저녁』은 한 구도자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존재의 규명에 시점이 집중되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끈질기게 그 남자의 뒤를 쫓았다. 남자의 영혼은 확실히 희귀했다. 그 희귀함에 그는 매료되었다. 그랬다. 그는 남자에 홀려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