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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은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대체로 부성을 따랐지만, 모성을 따르기도 했고, 심지어 혈연관계가 없는 성을 따르거나, 기존의 성을 바꾸기도 했다(수로왕은 모두 12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들 중 10명은 김씨를 계승하여 김해 김씨가 되었다. 다른 2명의 아들은 허왕후의 성을 계승하여 허씨가 되었다고 한다. 또 이 허씨 중의 일부는 훗날 인주 이씨로 개성한다). 모의 성을 따랐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성이라는 한자어가 ‘女 + 生’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과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모계사회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민족이 중국식 성씨를 수용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신라에서는 6세기경부터 왕실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에는 귀족 상층에서 중국식 한자성인 3성과 6성이 점차 사용되었다(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신라보다 일찍 성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이들 성은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성씨는 결국 신라계의 중국식 성씨라고 할 수 있다). 성씨가 지방에까지 보급된 것은 신라하대에 이르러서였다. 신라하대의 호족들은 중앙귀족을 모방하여 성을 사용했으나, 이는 일부 유력한 호족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은 그 시대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전국의 호족들에게 각 출신지?거주지별로 그곳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을 분정하였다(土姓分定).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군현 양민층에까지 성씨가 보급되어 갔다. 그러나 노비를 비롯한 천민들은 조선중?후기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16세기 전후 노비의 비율은 적어도 인구의 40-50%를 차지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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