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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해혁명의 불씨 - 무창봉기
당시 중국인들이 자비로 건설하던 철도공사가 별 진척이 없자 淸(청) 정부는 이를 국유화하
고 차관으로 건설하려 했다. 이에 四川(사천)에서 철도국유화에 반대하는 도로운동이 일어나 폭동으로 확대됐다. 폭동진압을 위해 무창에 주둔하고 있던 군이 사천으로 출동했는데, 그 틈을 이용하여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따라서 신해혁명은 武昌起義(무창기의) 또는 武昌首義(무창수의) 라고도 부른다.
1911년 10월 11일 중국 호북성의 성도 무창에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 사단장 여원홍에게
일단의 반란군이 들이닥쳤다. 전날 `청조 타도, 민국 수립`을 내걸고 봉기한 군인들로 이들
은 비밀 혁명 조직인 공진회와 문학사가 이끌고 있었다. 숫자는 약 6천명. 이 지역에 주둔 중인 청나라 군대의 3분의 1이 넘었고 잘 조직돼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지역을 점령하고 호북군 정부를 수립했다.
혁명군은 여원홍에게 최고 지도자인 도독에 취임할 것을 종용했다. 봉기 과정에서 정부군에 의해 지도부가 궤멸된 때문이었다. 반란군과 아무 관련이 없었던 여원홍은 이를 일단 거절했지만 대세가 혁명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16일 스스로 …
참고문헌
참고문헌
「중국근대사」 掘川哲男/ 삼지원 /1994
「중국근대사 연구 입문」 辛亥革命硏究會/ 한울/ 1997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아시아 歷史와 文化5」 신서원/ 1996
「19세기 중국사회: 서양의 충격과 대응」신승하/ 신서원/ 2000
「강좌 중국사6 : 개혁과 혁명」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지식산업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