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고운은 결국 세상을 떠나 가야산에 은둔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은거 연대는 분명히 밝힐 수가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가 천령군에서 바로 가야산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풍류적 생활을 한 뒤 가야산 해인사에 식구들을 데리고 가 숨어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추측된다. 「三國史記」, 卷 46, 列傳第六, 崔致遠條 <致遠自西事大唐 東歸故國 皆遭亂世 屯蹇連 動輒得咎 自傷不偶 無復仕進意 逍遙自放 山林之下· 江海之濱 營臺榭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州南山· 剛州氷山· 陜州淸涼寺· 智異山雙溪寺· 合浦縣別墅 此皆遊焉之所 最後 帶家隱伽耶山海印寺 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 棲遲偃仰 以終老焉>
많은 세월이 지난 뒤, 고려 현종 11년(1020)에 왕은 고운을 내사령으로 추증하고 14년 태평(太平) 2년 임술(1022) 5월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나중에 최치원을 추증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에 우리 태조가 일어날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사람으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 것을 알고서 편지를 보내 문안드렸는데, 그 글 중에 『계림은 누런 잎이…
참고문헌
*참고 문헌*
김인종외, 「고운 최치원」, 민음사, 1989
이구의, 「최고운 문학연구」, 아세아문화사, 2004
양기선, 「고운 최치원 연구」, 한불문화출판, 1995
박종근, “최치원의 정치이념과 종교관“
안항용, “최치원사상연구”, 「한국 철학사상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李基白,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韓國硏究院,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