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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알 수 있는 또 한번의 일화는 후진後晉의 고조高祖 석경당石敬瑭이 자신의 아들 석중예石重睿를 풍도에게 부탁하고 죽었지만 풍도는 석경당의 형 석중귀石敬貴를 천자로 추대하였다. p.226
역사歷史에서 보통 임금은 자신이 가장 믿는 신하에게 자신의 후사後嗣를 맞기곤 하는데 그 신하는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최선을 다하는(목숨까지 버리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풍도는 “재상이라면 사사로운 정에 끌려서는 안 된다.” p.227, 1行
, “국가가 어려운 때일수록 나이든 군주를 세워야 한다.” p.226 21行
며 석중예가 아닌 석중귀를 소제(小帝)(후일 출제出帝로 불리워짐)로 추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이때 뜻을 같이한 천평 절도사 경연광景延廣은 이 공功을 앞세워 조정朝政의 실권을 장악했지만 풍도는 그 권력다툼에 참여하지 않은 사실을 통해 고조의 부탁을 거절한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다지는 등 개인의 욕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를 우선시 하는 그의 국가우선의 실무중심의 처리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풍도는 권력다툼에 참여하여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열중하지는 않았다. 또한 박학다식하고 만인과 다투지 않아 주위에 적을 두지 않으며 청렴하고 국가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자질資質과 품성品性을 지는 그는 그런 난세에 찾아보기 힘든 인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