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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소론과 남인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되는데, 이 때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되었다. 결국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과 다산은 유배를 가게 됨으로써 정약용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린다.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됨으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정약용을 죽이려는 세태 속에서 정약용의 피안의 세계는 오직 학문이었다. 그는 문을 닫아걸고 죄수처럼 머리도 빗지 않고 1815년 문산 이재의에게 보낸 정약용의 편지에서
학문에 쉬지 않고 매진했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5백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니 18년 동안에 걸친 강진 유배기는 저술 작업의 기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정약용은 귀양지 경상도 장기에서 농민들의 삶을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누구 하나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도 못사는 이유를 정약용은 관과 지배층의 수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상추쌈에 보리밥을 둥글게 싸 삼키고 / 고추장에 파뿌리만 …
참고문헌
1. 황패강, 『한국문학작가론 3』,「정약용 편- 김상홍」, 집문당, 2000.
2.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5.
3. 금장태,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이끌리오, 2005.
4. 박석무, 『다산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 2003.
5. 다산학술문화재단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