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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수유전(烟受有田)과 연수유답(烟受有畓)
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에 연수유전(烟受有田)과 연수유답(烟受有畓)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민호가 국가로부터 지급 받아 가지고 있는 전답이라는 뜻으로 722년(성덕왕 21) 8월 백성에게 지급하였다는 정전(丁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연수유답전은 4개의 촌락에 있는 총 농지면적의 90 %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 한 촌락에는 촌주위답(村主位畓)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연수유답전은 1호당 10결(結) 이상이고 1정당(丁當) 5결 이상으로 호구에 비해 토지가 지나치게 많다. 이것은 당시 농업기술의 한계로 휴경지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되고 있으나, 연수유답전이 자연호 몇 개를 묶은 편호(編戶) 단위로 지급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촌락에 따라 호별 연수유답전의 면적이 크게 다르고 또한 호구·소·말·나무 등과는 달리 연수유답전의 변동사항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는 등 호구수와 토지면적 사이의 별다른 대응관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Ⅳ. 녹읍(祿邑)부활 : 귀족세력 억압책의 실패
8세기 중엽에 이르자, 귀족 세력이 전제왕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결과 757년(경덕왕 16) 관료전(직전)과 세조는 폐지되고 녹읍(祿邑)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왕권강화를 위하여 귀족들의 토지 지배를 견제하려던 시책이 실패한 것으로 귀족세력이 국가를 능가한 것을 뜻한다. 이후 신라 사회는 귀족 및 사원세력을 중심으로 토지의 장원화(莊園化)가 초래되어 국가경제가 위태롭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