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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후 시기에도 송덕기옹의 택견을 전수 받았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오래가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무예에 대한 이해와 애착이 부족하였고 또한 경제적인 수단이나 명예획득의 도구로써 당시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신한승선생 보다도 더 빠른 시기인 1971년에 {대한태권도협회}의 `임창수사범(現 在美 武道人, 57세)`이 송덕기옹으로 부터 택견을 사사 받았고 그에 관한 기록이 {태권도지, 1971년 가을호}에 실려 있는데, 예용해선생의 연구 조사에는 없는 몇 가지 기록이 더 있어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으로 임창수사범이 미국으로 건너감으로써 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한 택견연구가 중단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한승선생은 외길 집념으로 택견의 연구와 정리작업에 모든 것을 걸고 평생을 받쳤다. 송덕기옹으로 부터 사사를 받기 위해 생활터전인 충주(忠州)에서 서울의 사직동으로 수십차례 왕복하면서 거리상의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로 큰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렇게 어려운 와중에서도 개인은 성취감은 물론이고 택견의 보존과 보급을 위해서는 문화재로 지정받는 것이 급선무라 믿고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문화재관리국에 제출했으나 남아있는 기술과 체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히 거절당하고 말았다. 사실 그 동안의 연구에서 알게 된 송덕기옹이 보유하고 있던 30가지 정도의 기예에 우리무예의 기법이 충분히 담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무예에 대한 학술적인 토대가 전혀 없었던 그 시기에는 아무도 그 맛과 깊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