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렇게 추리해 보면,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난해한 시구로 여겨질지라도 당대로서는 상당한 정도의 보편성을 지녔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 해도 역시 그것은 계층적 제한성을 갖는 표현이라고 할 수는 있다. 판소리의 역사는 그런 제한성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계층의 문화적 구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이러한 계층적 제한성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계층적 제한성을 지닌 표현이라는 말이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문화를 대중지향의 문화라고 하는 점을 감안하고, 또 전파매체를 비롯한 집단전달의 매체가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시대에 언어의 계층적 제한성은 더이상 성립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판소리 사설 문체의 선택은 이러한 당대성의 원칙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 신문의 경제면에서 읽을 수 있는 외국어의 홍수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괴롭지만 당대적 표현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미적 자질의 성향
판소리가 비장과 해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일반적 인식은 사설 창작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특히 판소리적인 매듭은 웃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대한 확연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 점은 창극을 공연하는 자리에서도 늘상 확인되는 사실인데 웃음이 결여된 창극은 그것이 제아무리 무대적 흥미를 고양한다고 하더라도 판소리와는 별개라는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판소리에서 왜 비애와 해학이 동시에 추구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적절한 해석이 제시된 바 있다. 한 인간이 오로지 부정적으로만 존재할 수도 없고 완전히 긍정적으로만 설명될 수도 없는 양면성을 지닌다는 것은 심층심리학적 분석에 기대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