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넷째 세계의 많은 창조신화들이 우주창조 이전이 상태를 혼돈으로 상정하고 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중국의 반고의 천지개벽, 헤브라인의 창조신화(구약 창세기) 그리고 우리나라의 제주도의 천지 개벽 신화에 관한 신화, 그리스 신화에서의 카오스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중요한 여러 신화가 우주창조 이전의 상태를 혼돈으로 상정하고 있다. 우주창조에 선재하는 원질로서 혼돈의 상정은 인류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의 하나이자 만물의 시원을 탐구하는 우주론적 철학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주론적 철학의 배경에는 오랜 신화적인 전통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시공의 상격한 거리를 뛰어넘어, 모든 신화가 우주 창조에 앞서는 원질로서 혼돈을 설정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혼돈이 무질서나 혹은 문자 그대로의 혼돈이 아니라, 우주생성의 원동력으로서의 음과 양, 하늘과 땅, 남과 여, 인간과 동물, 악과 선, 성(聖)과 속(俗), 문화와 자연 등 양속성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인 원초의 합일체로서 완전성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념은 특정한 민족이나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창세신화에는 계보가 있다. 누가 누구누구를 낳았다는 식의 계보식 창세신화는 신화적 사유의 각도에서 보면 인류탄생사요 민족형성사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당수 창세사시가 으레껏 자신들의 조상으로 간주되는 창세대신이나 창세거인들에 대한 찬송과 축송으로 시작되는 것은 신화의 역사가 원시 선민들에게는 살아있는 역사, 영원히 존속되어야 할 진정한 역사로 인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