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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대 유교의 전개
불교나 유교경전을 해독하거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한자의 보급이었다. 중국의 유학이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초기철기 시대 중국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철기문화와 함께 한문이 전래되었을 때 유학도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에서 확실한 것은 삼국시대 율령의 반포라든가 국가제도의 정비에서 기본이 되는 정신으로 유교를 수용하였는데, 먼저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워 유학을 교육하였다. 백제는 4·5세기경 박사 고흥(高興)이 ꡔ서기(書記)ꡕ에서 왕인(王仁)의 활약으로 그 모습을 알 수 있고 ꡔ구당서(舊唐書)ꡕ의 백제관계 기록에서 오경(五經)과 자사(子史)가 있었다고 하였다는 것에서 유교의 경전인 5경이 널리 읽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는 7세기 중반 당의 국학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648년 김춘추가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에 참가하였으며 이 무렵 국학을 설치하였다. 신라의 청소년들이 3년을 기약하여 ‘시·상서·예’ 등을 읽고자 맹서한 것이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 보이는데, 이를 통해서 신라유학의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겠다.
통일 이후 유교는 통치이념으로 보다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확대된 영토의 운영원리로 유학이 주목되면서 682년(신문왕 2)에는 국학(國學)이 설치되었다. 국학에서의 교육은 3과(科)로 나누어 실시되었는데, 여기에서 가르친 책들은 ꡔ논어ꡕ와 ꡔ효경(孝經)ꡕ을 필수로 하고, 오경(五經)과 ꡔ문선(文選)ꡕ이 과에 따라 선별적으로 추가되었다. 3…
통일 이후 유교는 통치이념으로 보다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확대된 영토의 운영원리로 유학이 주목되면서 682년(신문왕 2)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