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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문식의 성씨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원시 씨족공동체 단계에서 이루어진 족외혼은 어디까지나 같은 씨족끼리 혼인을 피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시 씨족 공동체의 붕괴와 함께 씨족명은 성(姓)으로 옮겨졌다. 애초에 성은 권력층에게만 부여되었다. 성씨의 부여는 일종의 신분적 특권이었다. 귀족들에게는 성이 있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성이 없이 이름만 주어졌다. 씨(氏)의 설정은 성의 양적 증가에 따르는 동족의 지역성 확대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전주 이씨, 안동 권씨 같이 씨칭이 지명을 취하고 있음은 그것이 지역적으로 분화된 동족의 계통임을 드러낸다. 14세기 이후에는 인구 증가에 따라 동족 성원의 양적 확대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본관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다. 본관의 사용은 대략 14세기 말부터였다. 그리하여 본관 수가 김씨는 500가지, 이씨는 470가지를 넘어섰다. 또 동일한 본관도 다시 파로 나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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