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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역사서인 『고려사』의 기록대로 라면 신돈의 어머니는 종인 천한 신분출신에다가 글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여러 과부를 꾀어 간음이나 하던, 막말로 땡 중 짓이나 하던 인물이었다. 후에 공민왕을 만난 `거짓으로 꾸며 몸을 항상 마른 나무처럼 하고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항상 한 가지 찢어진 장삼을 입었다“라고 되어있다.
즉, 이 기록대로 라면 신돈은 왕을 현혹해 나라를 어지럽힌 요승(妖僧)이며, 구제불능의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고, 역사상 어떤 인물이 그 만큼 혹독한 비난을 받은 사례가 있을까 할 정도로 기록상에 남아 있는 신돈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사실상 이렇게 묘사될 만 할 수도 있는 것이 공민왕 시절인 고려는 흔히 불교국가라고 할 정도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았다. 또 『왕사(王師) · 국사(國師)』 등의 제도를 두었던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되었으며, 그 지위에 있는 승려들은 불교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나아가 국왕의 자문에 응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교사상에 충실한 승려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정치에 직접 관여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고려의 정치이념이 기본적으로 유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대체로 유교사상에 투철한 국왕과 그 신료들에 의해 통치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고급관리를 배출하는 과거제도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자들을 선발하는 데 치중하였다는 점은 그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한 제도 안에서, 특히 고려에서는 『인종 13년(1135)에 노비로 승려가 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이 있었기 때문에, 신돈은 더 더욱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