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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부여는 한랭한 북방의 송화강 유역에서부터 온난한 평야지대인 요하유역로 나아가고자 하였고, 고구려 역시 압록강 중류의 산간지대에서 농경지로 적합한 요동지역에 진출하려 하였으므로, 두 나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여는 후한과 밀접한 군사외교를 펼쳐 나갔다.
중국과 부여와의 관계는 대부분이 우호적인 것이었다. 흉노(匈奴)의 세력이 강했던 서한(西漢) 초에는 그 관계가 비교적 적었으나,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한 이후 관계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두 나라의 관계가 급진전하게 된 것은 후한 초부터이다. 이 당시 부여는 남쪽의 고구려와 서쪽 유목민들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한 왕조도 선비족과 고구려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고 이들을 억누르기 위해 부여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여와 후한은 오래도록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게 된다. 이 같은 관계를 말해주는 여러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부여왕이 죽으면 옥(玉)으로 만든 관을 사용하였는데, 한 왕조가 ꡒ미리 옥갑을 현도군에 가져다 놓고 왕이 죽으면 현도군에서 가져다 쓰게 하였다.ꡓ고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