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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시대
전략적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이미 조선초기부터 논의 되었다. 왕권의 안정을 이룩한 태종 대에 남한산성 수축 문제가 제기 되었으며 그후 세종대에 들어서 경기 군기 점고 찰방의 건의에 따라 강화의 교동산성과 함께 풍년을 기다려 수축하도록 하였으나 수축이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후 수축문제가 다시 논의 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6년(1603) 2월이며 광해군 때인 광해군 13년(1621)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또한 남한산성이 대대적으로 수축된 것은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사이였다. 수축 결과 남한산성은 성의 둘레가 6,297보가 되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유사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지켜주는 보장지로 인식되었기에 5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이 주둔하였고 사도유수부의 하나가 되었던것이다.
<조선후기에 그려진 남한산성전도>
4) 일제강점기
개항 이후 물밀 듯이 들어온 외세, 그 중에서도 일본은 점차 침략자로서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이후 척사사상을 갖고 있는 유생들이 중심이돼어 의병항쟁이 펼쳐졌다.
1896년 봉기한 경기의병의 의병투쟁 거점은 남한산성이었다. 경기의병이 남한산성에 집결한 것은 2월 23일이었으며 2월 28일 이천의병부대와 합세하여 남한산성을 완전히 점거하였다. 그후 서울진공계획이 있었으나 관군에 체포되어 회유된 김귀성이 남한산성 서쪽 성벽에 파손된 사실을 관군에게 알렸고, 이곳을 통하여 관군이 일시에 남한산성 내로 진격하였기 때문에 남한산성은 함락되어 서울진공작전은 무산되었다. 그후 일본은 1907년 8월 1일 조선의 군…
1896년 봉기한 경기의병의 의병투쟁 거점은 남한산성이었다. 경기의병이 남한산성에 집결한 것은 2월 23일이었으며 2월 28일 이천의병부대와 합세하여 남한산성을 완전히 점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