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고려시대
●혼인에 대해...
고려가 일부일처의 사회였는가 아니면 일부다처의 사회였는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였다가 고려말이 되면 일부다처제였던 몽고의 영향으로 일부 관인층 사이에서 일부다처의 경향이 나타났다.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시기의 해프닝으로 ‘박유 사건’이 주목된다. 원간섭기에 박유는 “고려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므로 여자의 머리가 희어지도록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서 한 명씩 첩을 더 둘 것을 상소하였다.
「혈족혼」
신라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받은 고려의 풍습 중에 혈족혼이 있다. 이는 외척의 세력팽창을 막기 위함이라고 풀이하는 의견이 있다. 이 같은 혈족혼이 왕실에만 국한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당연히 사대부 사회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고려 일대의 국속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차츰 유교의 전파로 말미암아 문종 때부터 제신들에 의해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고려말 공민왕대까지도 왕실에서조차 실천이 안 되었다.
「축첩제도」
왕후귀족 및 일반 부유 계급에서는 축첩의 습속이 성행하였다. 첩이라고 해도 본처와 별로 차별 대우를 받음이 없고, 마음대로 떠나거나, 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그리고 대소관리에게 일처일첩을 허락하며. 그 소생들에 대해 적서의 차별없이 똑같이 관리등용에 응하는 길을 터놓았다. 이 같은 제도를 보면 오히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여노예와 자유인과의 금제」
고려시대에 와서 노예와 자유민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제도가 생겼다. 고려 중엽 정종 5년(1035년) 수모법이 제정되어 父가 양민이라도 母가 노예이면 자녀 역시 노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