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설명
이성봉 목사의 생애, 이성봉 목사의 설교, 이성봉 목사의 설교분석 등 이성봉 목사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조사, 분석한 리포트입니다.
이성봉목사생애연구-발제[1]
본문/내용
남한 지역에서 부흥사역을 수행케 하는, 사역 지역의 이분화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목사는 이 결정에 불복하고 결국 전국 부흥사 임명 1년만에 휴직청원을 제출하게 된다. 이 목사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라는 신앙적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지만, 이 사건 배후에 그릇된 교단정치와 일부 교역자들의 인간적 시기와 질투가 스며들어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휴직청원 후에 이 성봉 목사는 신학을 연구할 목적으로 4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 목사는 대략 2년 정도 일본에 머물렀는데, 처음 의도와는 달리 신학교에 입학하고도 그는 엄쳐나는 구령열로 인해 동경, 신도, 대판, 관도, 풍교 등 각 곳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책상 앞에 앉아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깊이 빠져들기에는 죽어가는 영혼들의 촌각을 다투는 신음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인, 한국인 가릴 것 없이 부흥회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동경성결교회를 임시로 맡아 돌보고 또 방 수원 목사의 주선으로 ‘인생 허사가’, ‘하나님은 사랑이라’ 등의 독창을 레코드에 취입하여 큰 호응을 얻는 등, 그의 일본사역은 알찬 수확을 거둔 시간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 목사가 1941년에 임명받은 사역지는 이 목사 자신이 스스로 청원했던 만주 지역의 봉천 중앙교회였다. 이 목사가 만주 지역을 원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고조되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로부터 벗어나 보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국내에 남아서 일본의 탄압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에 비하면 분명 하나의 도피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처신이다. 사실 이 목사는 황해도 송화읍 무초교…
일본에서 돌아온 이 목사가 1941년에 임명받은 사역지는 이 목사 자신이 스스로 청원했던 만주 지역의 봉천 중앙교회였다. 이 목사가 만주 지역을 원했던 가장 직접적인…
참고문헌
박명수,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 (경기부천: 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이천영, 성결교회사(서울: 기성출판부, 1970)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제 1회 연회 회의록, “서부지방 교세보고”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출판부 발행, 1937, 19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성결교회사」, (1992)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 조명」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정인교,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그의 부흥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분석」, (경기부천: 성결신학연구소, 1998)
이성봉, 「이성봉 목사 자서전 전집」,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