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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개: 조선 세종때 일본의 서개에 찍을 직인(도서)을 하사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에 보낸 서개에 도서를 사용치 않고 문구중에 천황,황상같은 부분이 있어 조선에서 서개 접수 거절, 그러자 정한론이 재개된 사건.
일제의 침략 개시: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향하고 있는 대원군이 퇴진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조선의 대외정책에 변화를 가져오자 조선의 개국을 위한 침략정책인 정한론이 일본 국내에서 강력하게 대두, 다른 나라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운요오호사건을 일으킴.
운요오호사건: 일본이 근대화의 과정을 밟으면서 제국주의적 침략주의를 모방, 그대로 조선에 실천코자 한 첫 시도에서 비롯됨, 1875년 부산에서 양국 대표사이에 회담이 열렸지만 결렬되자 최신군함 3척(운요오호, 춘일, 제이정묘)을 동원 무력시위를 감행, 그 해 5월 동해안 영흥만 원산 앞바다 시찰, 2차로 영일만과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조선에 대한 시위운동을 전개, 8월 강화도로 접근 담수를 공급받는다는 구실로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려하자 초지진의 포대에서 발포 운요오호는 일본기를 꽂고 응수하였다. 이 교전으로 초지진에는 5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운요오호에는 2명의 부상자뿐이었다.
쇄국에서 개국으로 구책을 변경하게 된 이유: 1 개화사상가들의 주장, 세계적인 대세. 2 일본의 무력 협박이 척화론 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는 점. 3 쇄국보다 개국을 주장하는 일파가 우세하였다는점. 4 북양대신 리웅장의 조언 등의 영향으로 개국을 채택하게 되었다.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강화도에서 조선대표 신헌과 일본대표 구로다 사이에서 12관의 조약을 맺었으며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왕조는 아무런 준비 없이 개항을 강요당해 일본이 구미열강에게 강요당했던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1조: 조선의 자주권을 일본과 동등권으로 한다는 것으로, 청의 간섭을 봉쇄, 장차 조선침략을 용의하게 하자는 저의다.
2조: 일본은 서울에 공사관 설치 권한을 쉽게 획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