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장소를 계백의 집, 시간을 여섯 시간, 가족 처치의 갈등이란 단일한 주제에 두어서 엄격한 고전주의적 삼일치의 법칙을 준수한 이 극적인 단편의 새로움은 그러니까 그 고전적 격조와 극적 갈등의 주제에 있는 것이다. 작품의 고전적 격조의 분위기는 이 작가의 전혀 새로운 경지다. 예컨데 초기의 작품에서 폭력에의 충동과 함께 폭력적으로 생물학적 차원에서 그려진 성행위가 이 작품에서 품위 있고 간결하게 거의 서정시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경우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진지함과 사람살이의 설움에의 무한한 회포를 자아내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손창섭에 있어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가 정치 현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계백의 아내를 통해서 표명하고 더구나 생명의 고귀함을 그 근거로 삼았다는 것도 그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였다.
그러나 그는 이 변화를 징후로서만 보여 주었을 뿐 지속적인 발전의 계기로서 보여 주지는 않았다. 그는 곧 나라를 등지고 마는 것이다.
그후 그는 작가로서의 성장의 자취를 보여 주고 있지 않다.
5. 역 설
손창섭 문학의 역설은 그가 삶을 신의 희작이라고 보고 또 낙서라고 보면서도 그 나름의 진지함을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아온 것처럼 그는 지구에 떼지어 사는 사람들을 차라리 지구의 병, 지구의 질환이라고까지 보았다. 그는 인간의 이상에 관해서, 보다 나은 삶의 양식에 관해서, 질환적인 삶이 아니라 사랑으로 엮어질지도 모르는 공동체에 관해서 단 한번의 공상도 해본 적이 없다. ‘당신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 이란 그의 아내의 말은 과시 맞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