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3. 발해사가 한국사에 편입된 근거
1) 민족문제와 외교문서
발해의 영역이 고구려의 그것을 대부분 계승하였고, 그 주민들 역시 고구려의 후손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비록 왕실의 역사는 단절되었다 할지라도, 주민의 역사는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왕실에 있어서도, 고구려왕실 붕괴(668)후 30년만에 세워진 발해왕실이었지만 그들 스스로는 고구려 계승국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788년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 [고(구)려국왕대흥무언(高(句)麗國王大欽茂言)]이라고 하였다든지, 성씨가 밝혀진 32명의 일본파견 사신들 중에서 26명이나 고구려의 고씨였다는 점에서 확인되었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발해가 신라와 같은 위치에서 언급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
2) 문화적 측면
문화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발해인들이 고구려인이었다는 사실은 입증이 가능하다.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무덤과 주거양식에서 발해인들은 고구려인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석실분 및 석곽·석관묘를 발해인들도 사용하고 있었는가 하면,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온돌을 발해인들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남북국의 대립과 교섭
신라와 발해는 230여 년간 교섭보다 대결의 시기가 더 길었다. 끝내 두 나라는 대결을 해소하지 못했으며, 발해가 이민족의 침략에 의해 붕괴되자 발해유민의 상당수는 거란의 협조자가 되어 거란군으로 고려와의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남북국의 대립에 관한 기사는 주로 신라와 당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이 기록을 통해 발해의 대결의식도 대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호칭면에서, 신라는 발해를 `흉이(凶夷)`·`말갈발해`등으로 불렀고 [발해]라는 공식 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잘 불러야 [북국]정도였다. 무력적 대결은 더욱 확실했다. 신라가 개성(開城)을 쌓고(713) 북경(北境)…
호칭면에서, 신라는 발해를 `흉이(凶夷)`·`말갈발해`등으로 불렀고 [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