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독재적인 급장에 억눌려, 귀중한 물건을 상납하거나 물까지 떠다 바쳐야 했던 반, 혹은 70년대의 사회상에까지 확대, 반영시켜 자유가 없던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에 대해 분개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답답해하는 이유는 한병태라는 한 인간의 신념, 혹은 이상을 그가 가진 가치관의 저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먼 곳에 있던 추한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하게 만들어 버린 힘, 그의 일생에 걸쳐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게 한, 알더라도 그에 대해 믿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린 힘 때문이다.
가장 큰 충격은 아무래도 한병태가 사회에 나가 깨끗이 부정했어야 할 석대를 다시금 의식의 표면에 떠올린 일이다. 병태의 이야기는 한 시골 마을의 덩치 큰 급장의 횡포 아래서,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그를 극복해 낼 수 있었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럴 뿐이어야 했을 뿐, 병태의 굴절된 의식이 꿰뚫은 이 사회의 진리는 Y국민학교의 5학년을 지배하던 그 힘이었다. 적어도 난 그것이 옳다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그의 삐뚤어진 의식의 방향이 - 그것을 굴절시켜 놓았다는 것만 해도 커다란 충격이었지만 - 사회의 본질을 잘못 짚었다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생활의 진창에 짓이겨진 병태가, 한발 물러서 바라본 이 세상은, 절망스럽게도 그 힘이 지배하고 있었다.
모래 위의 궁궐 같았던 대기업은 번창하기만 하고, 병태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그곳을 떠나야 했지만. 그러지 않은 동료들은 `성공`을 이루었다. 부동산 투기에 손을 댄 동창은 떵떵거리며 살고, 자신보다 능력이 딸렸던 친구는 교수라는 자리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