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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은 서화와 도자기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서화에서 한 작가의 명작을 100점 이상씩 수집했다는 것이 간송미술관의 특징. 그래서 겸재 정선 회화, 단원 김홍도 회화, 추사 김정희 서화, 오원 장승업의 회화는 모두 100점 이상씩 소장하고 있다. 따라서 간송미술관을 뒤지지 않고는 이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오원이 1897년 타계했다는 사실이나 신윤복의 본명이 신가권(申可權)이라는 사실 모두 간송미술관이 있었기에 알아낼 수 있었다.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이 대략 5000~6000점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몇 점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송미술관측은 이를 밝히지 않고 있다.
설립 당시 이름은 보화각(쎷華??이었다. 설립자인 간송은 문화재 수집 차원을 넘어 당대 문화계의 최고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다. 간송은 1950년대 중앙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화가 고 장욱진이나 권옥연에게 간송미술관 직원 월급날 함께 월급을 주기도 했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고 김원룡과 고 최순우에게 각각 삼불과 혜곡이란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간송이 1962년 타계하자 3남 전영우가 보화각을 이어받았고 1966년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권유로 박물관 학예직이었던 최완수가 보화각에 들어가 전영우와 의기투합,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우고 보화각의 이름을 간송미술관으로 바꿨다.
최완수는 연구실장 자리에 앉았고 이후 그가 작품 관리 및 연구 등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다. 전시를 너무 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 최 실장은 “공개가 능사가 아니다. 제대로 연구가 이뤄지고 나서 전시가 열려야 한다”고 못박는다. 전시를 해도 작품은 소장품으로 제한하고 외부에서 유물을 빌려오는 법은 절대 없다. 또한 간송미술관은 소장품…
최완수는 연구실장 자리에 앉았고 이후 그가 작품 관리 및 연구 등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다. 전시를 너무 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