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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종필을 자민련 당사에서 2000년 1월 24일 만난 이야기부터 해보자.
필자는 1999년 말부터 『제민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을 통해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사건」 「예비검속자 총살 암매장 및 수장사건」 등을 미국 비밀문서 등의 자료로 공개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민족과 유가족의 이름으로 장도영, 김종필, 박정희, 김두찬 등을 고발’한 바 있다. 그러자 자민련의 이덕주 특보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종필 명예총재가 만나자는 것이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김종필 측이 연락해 온 이유는 4·3사건 때문이었다. 김종필은 “나는 4·3때 군인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4·3 양민학살과 관련이 있나?”라고 항의해 왔다. 필자는 기자회견 석상에서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사건을 집중조명했는데 이를 확대해석한 어떤 기자가 4·3 제주사태까지 연계해 보도하는 바람에 문제가 됐음을 김종필과 만나면서 확인했다.
2000년 1월 24일 오전 김종필을 만났다. 그는 대전형무소 등의 정치범 처형은 “김창룡 장군이 했다고 대구에 가서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예비검속자 처형도 “김일성이가 남한에 지령…
박정희 자신도 자신의 과거 좌익전력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소위 열등 콤플렉스가 심했지만, 그는 자기와 비슷한 해병대 출신들의 열등 콤플렉스를 악용해 동조세력으로 삼았다는 것이 김윤근을 만나면서 확실해졌다. 해병대는 해군에 예속된 소위 ‘Second best’로, 육군도 해군도 아닌 ‘의붓자식’ 취급을 당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어정쩡한 장 면 국무총리의 대처(수녀원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음)로 무혈 성공했을 때 해병대 출신들의 사기는 충천하고도 남았다. 전역 후에도 그 대가는 상당히 후했다. 국영기업체 사장직을 하나씩 떠맡아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구악을 일소’한다는 쿠데타는 ‘신악’을 만들어 온갖 부정과 부패의 도를 더했다.
박정희는 이후 자신의 쿠데타를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해병대 세력을 거세하고 만다(1963년 3월 11일). 심지어 불안을 느낀 박정희는 해병대를 해체해 버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1973년 10월 10일). 결과적으로 해병대는 ‘육군에 이용’ 당하고 만 것이다.
참고문헌
1) Criminology(범죄학) 제5차 강의록(경기대학교 이윤호교수)
2) 한국 민족대백과 사전
3)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4) 한국사 대사전 (上)
5) 1950년대 한국 사외와 4.19혁명 - 한국 현대사의 이해 2 - <태암출판사>
6) 한국현대사의 올바른 인식 <동방서적>김재균, 5.18과 한국정치, 한울아카데미, 2000
7) 김창진, 5.18민중항쟁연구, 소나무, 1992
8) 박준영, 정치학, 박영사, 2001
9) 박주나, 치유되지 않은 오월, 다해, 2001
10) 손호철, 80년 5.18항쟁, 새길, 1995
11) 광주민중항쟁, 돌배게인문사회과학신서, 1990
12) 5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13) 광주항쟁으로 읽는 현대한국, 사회문화원, 2001
14) 관련사진 자료 : www.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