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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유적의 분포
우리 나라에서의 구석기문화에 대한 연구는 광복 이전에 두만강가에 있는 종성 동관진(온성 강안리)유적의 상삼봉에서 출토된 홍적세(기)의 하이에나속 말사슴 들소와 코뿔이(소)의 뼈화석에 대한 보고(1935년)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동관진유적의 조사보고는 당시의 연구수준과 시대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높은 단계에서 고생물학적 조사연구, 층위의 구분 시도, 석기와 뿔연모의 수법, 형태에 관한 고고학적 분석, 화석의 정도(化石度)가 연구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사관으로 그릇된 역사인식의 논리때문에 부정되었고, 이와 같은 부정일변도의 자세는 광복이 된 다음에도 계속되어 왔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석기 연구는 처음부터 잘못된 시대상황 아래에서 이루어져 왔기에,『구석기』에 관한 보다 적극적인 해석과 이해가 편견 속에 묻히게 되어, 구석기학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으로 되어버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 우리의 구석기문화 연구는 그 시대와 문화의 부정에 대한 긍정의 답이 되는 것이고, 우리 역사의 상한을 신석기시대에서 구석기시대로 올려 놓게 되었으며, 우리 학문의 장을 세계로 펼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복이후 우리의 손으로, 자생적으로 시작한 구석기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많은 성과를 얻어, 남북한을 통털어서 30개 이상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각기 따로이 조사 연구를 전개함에 따라, 이것은 우리나라 구석기유적의 분포에 대한 특성으로 되게 되었다.
우선 구석기유적의 발굴 계기가 된 선봉굴포리유적(1963-1964년)과 공주 석장리 유적(1964-1974, 1990, 1992년)이 모두 한데유적이라는 점과 각기 동해안과 중부지방의 금강유역이라는 위치와 성격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