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배경
변화의 배경을 중국과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없지 않다.
첫째로, 극심한 경제난이 변화를 시도한 주요한 배경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고 본다. 북한은 자본의 유입이 막히고 식량과 에너지의 부족에서 오는 악순환을 겪으면서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러 계획경제 자체를 제대로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공급과 수요의 엄중한 불균형이 이루어져 주요 배분형식인 배급제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대부분의 수요를 국가공급이 아닌 암시장에서 충족시키는 사태에 이르렀다. 국가기능의 마비와 지하경제의 활성화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경제상황 상 과거의 배급제도를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7.1조치가 나올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도 사회주의를 하면서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시기가 두 번 있었고 두 번 모두 변화가 시도되었다.
첫 번째는 1959년부터 1961년의 이른바 3년 자연재해시기였는데 人災 7할 天災 3할이라고 한 이 전국적인 재난 속에서 1960년 인구가 1959년데 비해 1,000만명이 감소되고 1961년에는 그 전해보다 1,300만 명이 감소되었다. 3년동안 비정상사망과 출생률이 4,000만 명이 된다고 한다. 당시의 농촌은 극한상황에서 자체로 호도거리를 실시한 곳이 많이 생겨났다. 그 시기 유소기와 등소평을 비롯하여 “경제조정”정책을 펴는데 모택동의 묵인하에 농촌에서 “責任田”이 실험적으로 운영되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등소평의 명언은 이때에 나온 것이다. 전국에서 호도거리 바람이 불었는데 안휘성같은데는 90.1%가 이를 실시하였다. 林蘊暉,顧訓中:《人民公社狂想曲》,河南人民出版社,1995년,p.339.
자류지, 자유무역, 자체로 손익을 따지는 이른바 3自가 실시되였다. 1970년대 말의 농…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제부흥을 국가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것에 상응하는 관념갱신과 이론의 재정립을 시도하여 왔다. 즉 “사상관점과 사고방식, 사업기풍에서 혁명적인 전환을 가져 와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라면 기존의 낡은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버려야 할 것이다. 중국은 역설적으로 문화대혁명을 겪었기에 전통적인 사회주의체제와 모택동시대의 정치노선을 부정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에 필수적인 사상환경과 정치환경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이 부정하는 것은 지난날 실시하여 왔던 ”다른 나라 식의 낡은 틀과 관례”이다. 이 점이 중국과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이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있는 사회주의체계를 이루며 나라와 인민에게 실제적인 이익을 주는 것을 사회주의경제관리의 기본원칙으로 하면서 “실리”를 내세운 관념갱신은 변화를 위한 모색으로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체제수호에 대한 자신감과 변화에 대비한 후속조치가 얼마 이루어졌고 대외관계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려는 기대감과 자신감에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내적으로 “고난의 행군”속에서 최악의 상태를 극복하면서 북한은 체제수호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즉 개혁과 체제수호라는 딜레마에서 해탈할 수 있는 여유를 얼마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는 남북관계가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일, 대미 관계에서 새로운 전환을 이룰 것으로 판단하였다고 불 수 있다. 북한이 7.1조치 후 여러 개의 특구를 설정하고 대외관계에서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7.1조치 1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록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또한 대미, 대일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나아가는 상황에서도 사회적 혼란이나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인플레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후속조치가 준비되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