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군위안부`는 왜 발생했는가?
과거로부터 세계 각지의 군대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주변에 `유곽` 같은 것이 있어 왔다. 그러나 `군위안부`는 일본정부와 군부가 국가의 정책적으로 직접 창설하고 운영한 성노예 관리 체제 안에서 조직적으로 저질러진 강간, 윤간으로 세계 초유의 일이다. 이러한 `군위안부` 제도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시베리아 출병`(1918~1922. 10)에 의한 파견된 일본군들의 약탈, 강간, 성병만연, 치안부재 상태의 야기로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상해사변 때 병사들의 현지 여인 강간 사건의 속출로 현지 참모부장 오까무라 중장은 나가사끼현 지사에서 군대 위안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즉 일본군은 전쟁과정에서 더욱더 포악해져 살인과 약탈·강간·파괴행위를 서슴치 않고 감행하는 일본군 병사들을 진정 시키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위안부를 나누어주자`는 착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군의 사기제고나 치안 유지만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일본이 만주침략과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기회로 이미 추구해온 조선 말살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기도의 일환으로 감행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역사적 배경으로써 `군위안부`는 일본 공창제도의 변형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가부장제 하에 여성을 종속 시켰으며 남성의 성적 방종을 위해서 공창제를 보완하였다. 이 공창제도는 일본의 지식인과 위정자, 군부의 정책입안자들에게 일본의 경제발전과 해외 주둔 군인의 심적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였다. 마침내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하여 공창제도는 일본군이 매춘여성을 직접 관리하는 `군위안부` 제도로 전환하게 되었다. `군위안부`가 `여급` `작부` `기생` 등으로 표기된 것이나 공창제 하에서 쉽게 돈을 주고 여자를 사는 형식이 그대로 `군위안부` 제도로 이행된 것이므로 일본 군인들에 의해 거리낌없이 이용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