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3. 흥선대원군 정치의 단점
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66년 (고종(高宗)3년) 병인양요에 이어 기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高宗)이 친정(親政)를 계획하게 되자, 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高宗) 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4. 실권((失權) 이후 흥선대원군의 정치행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政權)을 잡았고 난(亂)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책동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텐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에 4년간 유폐되었다. 85년 귀국하여 운현궁(雲峴宮)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결탁하고 고종(高宗)을 폐 위(廢位)시키고 장남(長男) 재황(裁晃)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 실패하였다. 94년 동학농민운동에 의해 영립 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 와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日本)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閔氏) 일파가 득세하다 95년 정권(政權)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