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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창혁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으며, 항상 말하 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 ’고 하였다고 한다. 태인 산외리 동곡(山外里 東谷)마을에 옮겨 자리잡았을 때에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마지 기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小農)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 일 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 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되어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 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개혁의 지도원리로 인식하고 농민 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 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천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동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