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정체성의 다층성에 대하여
2000년 6월 스위스 쮜리히에서 열렸던 한국문학 낭송회에서의 일이다. 한 청중이 오정희(吳貞姬) 선생에게, 당신의 작품에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오정희 선생이 낭송한 작품은 「중국인 거리」였는데, 이 작품은 한국전쟁 직후의 피폐하고 혼란스러운 소도시의 일상 속에서 유년을 벗어나 성장해가는 한 소녀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 중국인 거리는 ‘비밀스럽고 환상적이고 괴기스러운’ 세계로 등장한다. 그 비밀, 환상, 괴기는 사실은 모든 유년에 공히 나타나는 세계 인식 상의 특징이다. 자아의 성장과 더불어 그 비밀, 환상, 괴기는 탈신비화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국전쟁 직후의 인천이라는 특수한 시공간 속에서 자아의 성장이라는 존재론적 보편성이 구현된다는 데 이 작품의 핵심이 있고, 그 구현의 세부적 양상에 이 작품의 매력이 있다. 그런데 그 스위스 청중은 그러한 보편성의 차원에는 무심한 채 왜 ‘한국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일까.
‘한국적인 것’이라는 질문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답변에서 오정희 선생은 작중화자의 할머니가 여자들 속옷 빨래를 바깥에 널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한 예로 들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꼭 한국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유교적 풍속의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고 유교적 풍속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일반에 공통되는 것이다. 역으로 스위스 작가에게 당신의 작품에서 스위스적인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질문을 받은 스위스 작가는 무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스위스 국…
‘한국적인 것’이라는 질문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답변에서 오정희 선생은 작중화자의 할머니가 여자들 속옷 빨래를 바깥에 널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한 예로 들었는데, 그러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