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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으면서, 저는 조병준이라는 기형도의 친구를 얼마나 부러워했었는지 모릅니다. 횔더린의 <히페리온>, 그리고 <랭보 평전> 등등을 기형도 때문에 읽었습니다. 말테의 수기를 다시 읽었고, 요즘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링크를 따라 떠돌듯(^^) 여러 텍스트들을 읽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텍스트들을 따라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학교에는 있었으나 수업엔 들어갔던 날보다 안 들어갔던 날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학기의 성적은 드라마틱한 경사로 추락하며 바닥을 쳤었지만, 제게는 그 어느 해 보다 풍요로운 가을이었습니다. 이때 기형도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를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눈을 감으면 나를 그 가을의 서울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수업을 빼먹은 어느 오전, 그 친구와 함께 호암아트홀에서부터 시청 앞 지하철 역을 지나 조선호텔을 지나고, 롯데백화점 앞으로 해서 영풍문고를 지나 인사동을 가로질러 낙원떡집에서부터 시작되는 돌담길을 걸어 풍문여고 앞을 지나, 사간동으로 접어드는 아주 낡고 오래된 목욕탕이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 아트선재를 지나고 국제화랑을 지나쳐 삼청동까지 걸어들어가던 그 길. 그 길을, 그 친구와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되었던 시들을 한 개씩 번갈아 가며 주고받으며 암송하며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나직하게 나직하게... 막히는 부분에선 서로 도와주기도 하면서, 쉼표가 있었네 없었네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그 가을의 기억은 화석이 되어 내게 남아 있습니다. 기억만이 화석이 된 것이 아니라, 우습지도 않았던 그 학기의 학점 또한 화석처럼 남았습니다만... ^^; 그 가을에 대해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을이 제 인생에 찾아오겠지만, 그 가을만큼 아름다운 가을이 다시 제게 찾아올까요... 그 친구에게도 제게도 다시 그런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