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또한 한국인들의 생활과 사고도 儒敎的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심지어 유교적이라는 단어는 다른 종교인들을 지칭할 때도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한국의 기독교인은 유교적 기독교인으로, 한국의 불교인은 유교적 불교인으로 불리울 만큼 한국인에게 유교의 영향은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 한국사를 ‘韓國 儒敎史’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 유교는 한국인들에게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 면에서 부지불식간에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해왔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수용된 시기는 자료의 불충분으로 분명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되던 해인 372년에 국립대학격으로 세운 太學, 이보다 앞서 전국에 오경이나 중국 역사와 무예 등을 가르치기 위해 일종의 보통학교격으로 세워진 扃堂 등의 흔적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후 유교는 고구려뿐만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에서도 인재 양성, 관리 등용 등을 포함하여 교육적인 기능을 담당하게 되면서 점차 확산되었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 시대로 내려오면서 현세기복적 측면, 내세, 교단 등을 강조하는 불교가 점차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기본 윤리나 일상의 도덕, 나아가서는 국가의 통치철학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일례로 고려 광종대에 실시된 科擧制度는 고려가 불교 교세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려가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강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燃燈會와 八關會를 폐지하고 崔承老의 시무책을 수용하면서 국립대학격인 국자감을 설치한 고려 성종의 조치도 여전히 고려 사회가 儒敎를 중시하는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비록 국자감은 문종대에서 쇠퇴하였지만, 그 시기에 崔沖을 중심으로 私學이 흥기하였고,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고려 말 安珦에 의해서 유입된 주자학의 흥기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