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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사를 망친 주범으로까지 비판받기도 했다.
민족의 발전을 위해 신라가 죽고 백제나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했다는 논리이다.망국민의 후예 물론 백제가 통일했으면 오늘날 우리의 국경선이 일본까지 이를지 모르고,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만주대륙까지 이를지 모른다는 점에서 아쉬움이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승자에겐 승리의 이유가 있고 마찬가지로 패자에겐패배의 원인이 있는 법이다. 김유신이 신라 사회의 주역이 된 것 자체가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김유신은 진골이었지만 망국민의 후예였다. 그의 증조부는 532년 법흥왕에게 나라를 빼앗긴 금관가야 국왕 김구해였는데, 그의 막내아들 김무력이 유신의 조부였다.
김무력은 백제와 전쟁 때 많은 공을 세워 1등급 각간(角干)까지 승진했지만 여전히 서라벌 출신 진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 유신의 아버지서현이 진흥왕의 형제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과 `야합(野合)`하여 김유신을 낳아야 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허락 받지 못한 결혼이었던것이다.
김유신이 서라벌이 아닌 지금의 충북 진천 지역인 만노군(萬弩郡)에서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만노군은 신라 5소경의 하나였던 중원경(충주)에 속해 있었는데, 중원경은 진흥왕이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그 유민들을 이곳에 옮김으로써 형성된 망국민의 집단 강제 이주처였다.
김유신이 자신의 누이를 진지왕의 아들 김춘추의 후처로 들이려 했던 것도 신분의 열세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김춘추가 유신의 동생문희를 임신시키고도 모른 체 하자 김유신은 아비 없는 자식을 임신했다며화형식을 벌이는 한바탕 소동 끝에야 겨우 둘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 김유신의 이 화형식은 단순한 정치적 쇼가 아니라 서라벌 진골 사회에 대한 가야파의 원망을 담은 항의의 시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