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은희경 님의 소설을 나는 이전에 여러 편 보았다. 나는 그 작품들 속에서, 그녀가 소위 <스토리 작가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묘사보다는 설명을, 보여주기보다는 말하기를 주로 사용하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의 주된 내용은, 결혼과 사랑, 이혼과 불륜 등이었다. 물론 이러한 소재들이 결코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문제는, 너무 흔하다는 것이다. 문단은 이 흔한 소재가 그녀의 손에서 낯설게 기술된다고 종종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가 다른 소재를 탐구하거나 주제의 지평을 넓히지 않고, 여성의 일상사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은 거의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이런 소재에의 의존은 여성 작가에게서 두드러진 성향이다. 물론 얼마든지 새로운 시각과 기술법으로 일상을 드러낸다면 소재의 상투성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 작가는 일상에 대한 회의주의나 안일주의, 분노나 불평을 내보임으로써 모든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만다. 나는 그녀도 이런 목소리 높은 여성 작가들의 군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애초에 점찍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의 상자를 읽고, 나는 적어도 이 소설만은 그녀의 다른 소설과는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극도로 정교한 상징과 수사, 뛰어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황폐화되고 비인간적인 현대인의 삶을, 막 잘라낸 유리의 단면으로 바라보듯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이 인생의 한 축도이고, 평범하지만 냉혹한 일상을 폭로하는 장치라면, 그녀의 소설은 이에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