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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전쟁과 중국
한편 신중국이 성립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유엔총회는 1948년 한국정부를 유일의 합법정부로 하는 결의를 채택하였었고, 이에 기초하여 미국정부는 즉각 안보이사회의 개최를 요구하여 북한을 침략자라고 하는 결의가 가결되었으며, 6월 27일 미국군은 유엔군의 주력으로서 전쟁에 무력개입하였다.
처음 북한인민군은 압도적인 우세로 진격하였지만, 9월 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것을 계기로 형세는 역전되고 10월 1일 한미연합군은 38도선을 넘어 북한영내에 진격하여 10월 중순에는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 부근까지 도달하였다. 10월 중순 한국군과 미군이 중국국경까지 육박하였을 때 중국은 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압록강 건너 북한 영내로 진격시켰다. 중국의 이 반격에 대하여 세계는 심상치 않는 긴장감에 휩싸였지만, 휴전회담을 개시함으로써 세계대전의 위기는 회피되었다. 그러나 갓 발족한 신중국은 인적·물적으로 많은 희생을 강요당하였고 또한 대외정책 선택의 폭이 현저하게 좁아져버렸다. 미국과의 관계 수복이 장기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버리고, 소련과의 결합을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 중국 내부에서는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원조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를 통하여 민족적 통합이 강화되고 앞서 말한 여러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지만, 구지배세력과 종교적 비밀결사, 국민당에 연결되는 비적 등이 한국전쟁을 기회로 미군과 국민당군의 진격에 의한 구체제의 부활을 기대하며 활성화되고, 토지개혁을 방해하는 등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에 대처하여 1950년 12월부터 1952년에 …
그 사이 중국 내부에서는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원조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를 통하여 민족적 통합이 강화되고 앞서 말한 여러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
3.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