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현대 동북아 문명의 상황
현대 동북아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동북아 문명의 맹주인 중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문화 사대주의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중국이 서구 문명에 대한 문화 사대주의에 빠졌다는 단적인 예는,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비하하고 파괴한 문화 혁명 말고도, 한자의 발음 기호인 자음 부호를 로마자로 채택하였다는 사실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대중 문화가 발달할수록 난해한 표의문자는 문명 발전에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중국 문명이 앞으로 로마자화될 날도 멀지 않은 듯이 보인다.
중국어의 발음 기호로 더욱 적합한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효율적인 로마자를 발음 기호로 채택하였다는 사실은 문화 사대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보아 마땅할 것이다. 국민당 정부 시절 만들었던 주음 부호나 5백년 전에 한자의 발음 기호로 실험되었던 한글이 로마자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이렇게 문화 사대주의에 빠지면, 자국 문화를 업신여기고 버려 가면서 패권 문화를 무분별하게 추종하게 된다. 이로써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정체성 혼란의 실체는 문화 의식의 이중성에 있다고 보인다. 문화 의식이 이중적이 되면 자국 문화와 패권 문화에 대한 애증이 겹쳐서 독자 행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다. 문명 접촉기일수록 필수적인 문화 분별력, 다시 말해서 지킬 것은 지키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문화 분별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국 문화와 패권 문화를 선별하여 종합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을 꾸며 나갈 힘을 잃게 된다. 이러한 문화 혼란을 극복하고 문화 분별력을 획득하려면, 얼마나 많은 피땀과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적어도 중화 문명에 대한 문화 사대주의에 시달렸던 한국과 일본의 경험을 살펴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