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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반대이유는 이상과 같은 네 가지였으며 그것은 당시 국내 사정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타당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명강경론자인 최영의 압력과 그의 압력에 눌린 우왕에 의하여 전쟁준비가 강행되고, 이성계도 우군의 지휘관으로 뜻에 없는 출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출정군의 최고 사령관은 최영, 우군의 지휘관은 조민수였고 출정군사는 10만이었다. 우왕 14년 4월 우왕과 최영은 평양까지 출진하였고, 같은 해 5월 좌우군은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마침 압록강이 불어 건너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기가 떨어진 장졸을 거느리고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무모한 것임을 깨닫고 회군을 단행하였다.(위화도회군) 이성계로서는 요동공격보다는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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