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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 1군이 아홉시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상륙했다. 17시에 시작된 공방전은 그날이 가기전에 끝났다고 하니 조선군의 형편없는 전쟁준비도를 알 수 있다. 그 후 4월 18일에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김해에 상륙하는등 최종적으로 5월이 가기전에 약 20만의 병력이 조선에 상륙했다.
얼마후 왜군의 침공 소식을 안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남쪽으로 내려보내고, 곧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그 뒤를 따르게 했으며, 유성룡을 도제찰사로 삼아 그들을 감독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상황은 ‘장수는 있어도 병사가 없다’란 말이 딱 걸맞는 상황이었고 겨우 수백명을 소집할 수 있었던 이일은 왜군과 이렇다할 교전도 못해본채 병력을 다 잃고 패주한다.
그 뒤를 따른 신립의 경우는 북방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온 병력과 충청도에서 집결시킨 병력을 포함하여 약 7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전투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이러한 병력상황과 보급상황, 그리고 왜군의 일부가 이미 조령을 넘었다는 등의 소식들이 신립에게 탄금대 전투에의 결전을 굳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신립의 군대는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이 전투에서 충청도의 병력이 궤멸했다. 결국 왜군은 파죽지세로 도성을 향한다. 도성을 지킬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항전은 무의미했고, 결국 조정은 북쪽으로 향한다. 당시 조선군의 몇 안되는 희망중 하나이던 임진강 방어선이 일본의 전술에 의해 붕괴되고, 일본은 결국 평양까지 점령하고 만다.
그러나, 전쟁후 2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일본의 진격능력은 급속히 저하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