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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후야오방이 보수파의 공격을 받고 사임한 때로 돌아가보면, 그 뒤로 자오쯔양이라는 인물이 총서기로 취임되었다. 그는 후야오방이 무엇 때문에 사임한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정책을 변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개혁개방을 추진하여 보수파와 맞서 나갔다. 1987년 당13회 대회에서 그는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제창했다. 이를 토대로 자오쯔양 총서기는 경제개혁의 추진에 맞추어 민주화까지 추진하려 했지만, 이는 천안문사태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베이징에서 학생시위가 발생했다. 이 때 등소평은 강경 자세, 즉 계엄령의 시행을 주장했고, 이에 대해 자오쯔양은 이들의 생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결국 그는 등소평의 의견에 무릎을 굽히고 말았다. 그의 실각은 곧 사태에 대한 무력진압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천안문사태의 결과로 등소평의 핵심측근이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권력핵심에서 떨어져나갔고 그 뒤로 장쩌민이 권력핵심으로 뛰어든 것이다. 당시의 중국권력자들은 누구도 장쩌민이라는 인물이 총서기로 등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는 다분히 등소평의 독자적인 판단으로서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기존 보수집단의 인물보다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쩌민은 기존 보수집단의 견제를 등소평의 도움을 바탕으로 극복해나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장쩌민은 쩡칭훙이나 주룽지 등 그의 핵심인물들을 바탕으로 점점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당 제14기 4중전회에서 상하이파에 편중된 인사이동을 시행 등소평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등소평의 제2세대에서 장쩌민의 제3세대로 권력승계가 완료된 것이다. 그 후는 탄탄대로였다. 자신감을 얻은 장쩌민은 그 후 당·정을 아우르며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국제적인 지위 향상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