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본론
국민당이 표면상으로 중국을 통일한 1928년 이후의 시기에 반자주적인 군사유력자를 우두머리로 한 지방정권(제임스 세리단의 표현을 빌자면 ‘잔여 군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군벌체제의 잔여세력이 1940년대 말에까지도 얼마나 깊게 남아 있는가를 깨닫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실, 일본과의 전쟁 발발은 국민당정권 안의 원심적 경향을 증가시켰는데, 이는 장개석에게 가장 충성스런 국부군의 부대가 초전단계에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군의 힘은 지방의 군사유력자들의 힘에 비해 약화되었다. 이 같은 변화의 정치적 결과는 중대한 것이었고 장개석 정부의 영도력과 권위는 그 뒤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왔다. 항일전쟁 동안 중앙정부와 용운(龍雲)이 거느리는 운남성의 지방정권과의 충돌이 일어날 뻔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국민정부는 겉으로는 영토, 인민 혹은 자원을 지배한 것처럼 보였으나 결코 확고한 통제는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1944년에 국민정부는 정부의 모든 기능을 지탱하는 데 중국 국민총생산의 약3~5퍼센트 밖에 쓰지 못했다. 이는 미국의 경우 47퍼센트인 것과 대비가 된다. 국민정부의 권위가 확실하게 통하는 성에서조차 행정기구의 하급단위는 중앙정부가 거의 장악할 수 없었고, 대부분 그 지방출신의 엘리트가 장악했던 것이다. 중앙정부와 지방간에 통일이 없다는 것은 국민당 정권의 정치구조에 기본적인 결함이었다. 즉, 국민당의 문제는 지방의 군벌들을 국민혁명군으로 받아들였지만, 잡다한 군대가 전주인인 군벌로부터 새로운 중앙정부로 충성대상을 바꿀 수 있을 만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정책을 쓰지 않은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전후시기에도 지속됐던 적대관계와 불신이, 국부군과 공산군의 싸움에서 국민당이 패하는데 일조를 했던 것이다.
항일전 첫해에 국민정부 치하의 농민들의 삶은 비교적 완만하였다. 식량생산은 전쟁 전의 평균보다 8퍼센트가 더 많았다.…
항일전 첫해에 국민정부 치하의 농민들의 …
참고문헌
ㆍ애드가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두레, 1992
ㆍ로이드 E. 이스트만 ≪현대중국의 전쟁과 혁명≫ 지식 산업사,1992
ㆍ서진영 ≪중국 혁명사≫ 한울, 1994
ㆍ굴천철남, 이양자 ≪중국근대사 ≫ 삼지원,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