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골품제
신라시대의 신분제도. 그 신분으로는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등이 있었다. 성골과 진골은 왕족으로 성골은 양친 모두 왕족인 자를 말하며 진덕여왕까지 왕위를 독점세속 하였으며 진골은 양친 중 한 편이 왕족인 자로서 제 2골이라고도 하는데, 태종 무열왕 때부터 경순왕까지 왕위를 세습하였다. 제 1위관인 이벌찬에서 제 5위관인 대아찬까지를 역시 진골에서 독점하였다. 6두품, 5두품, 4두품은 제 6 위관인 아찬 이하 말위인 17위관 조위가지의 관직을 가질 수 있어 역시 지배계급으로 귀족의 대열에 속했다. 다음 3두품, 2두품, 1두품이 있었음직하나 기록이 없다. 아마 이들은 평민에 속했을 것이다. 골품에 의한 제한은 후대에 내려올수록 복잡하여 관계(官階)에서 뿐만 아니라 의식주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차별적인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다. 즉 『삼국사기(三國史記)』「의복지」를 보면 골품에 따라 의복과 사는 집과 사용하는 그릇에까지 등급을 두어 제한하였다. 골품과 두품은 곧 집안과 신분을 뜻하였던 것이나 그들의 벼슬은 일대에 한했으나 골품과 두품에 의한 신분은 세습적이었다.
(1) 골품제의 기초집단
골을 혈족으로 보…
여 설정한 최고 관직으로, 국사를 관장하고 귀족·백관회의인 화백(和白)을 주재(主宰)하며 귀족연합의 대변자이기도 하였다. 이 중앙 귀족회의에서 가결된 것은 왕에게 상주(上奏)되어 그 재가를 얻어 실행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왕권에 대한 제약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관직은 족장(族長) 세력을 바탕에 둔 귀족연합의 권력 형태에서 설치된 것이지만, 견제를 받아오던 왕도 점차 병권(兵權)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증대하고 최고의 행정기관으로서 왕권의 지배를 받는 집사부(執事部)가 설치되었다. 수상(首相)에 해당하는 중시(中侍:侍中)가 임명된 중대(中代) 이후 상대등은 정치적 실권을 집사부에 넘겨 주어 권력이 무력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대(後代)에 이르러 왕권이 다시 약화되자 상대등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특히 800년대 전반기에는 상대등을 축(軸)으로 하여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으로서, 이에는 진골 중에서도 이찬이라는 고위 관등의 인물이 임명되어 귀족세력과 왕권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최고의 관부였던 집사부가 화백회의 및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진골 귀족세력에 대항할 필요에서 생겨난 것으로 그 장관인 중시 신라시대의 관직. 651년(진덕여왕 5)에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면서 그 장관으로 두었던 벼슬이다. 대아찬(大阿)에서 이찬(伊)까지의 관등(官等)에서 임명하였으며, 임기는 3년 정도였던 것 같다. 임무는 국왕의 행정적인 대변자이며 정치적 책임을 져야 했다. 747년(경덕왕 6)에 시중(侍中)으로 고쳤다.는 바로 왕권의 전위적 존재였던 것을 밝혔다. 신라에 있어 주요 관부의 장관인 령은 진골이 독점하였고, 육두품은 차관인 시랑·경까지 밖에는 오를 수 없었으며, 기타 대사 이하는 오두품 신분에게 개방하였다. 또한 6정·9서당을 비롯한 주요 군단의 최고지휘관인 주의 도독도 관등이 급벌찬·이벌찬으로 규정되어 있을 뿐 진골만이 할 수 있다는 단서는 없으나 이 역시 진골이 독점한 듯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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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왕-역사,한국사 이야기.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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