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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의 시비가 서 있는 나성터 금강(백마강)기슭과 시내 동남리에 복원되어 있는 생가가 그곳이다. 시비는 비스듬히 강을 향해 서 있는데 앞면에는 `산에 언덕에`가 새겨져 있다. 글씨는 박병규가 쓰고, 설계는 정건모, 조각은 최종구가 한 이 시비는 그가 작고한 다음해인 1970년 4월 7일 동료문인과 후배시인들이 주머니를 털어 세운 것이다. 한데 시비는 시원한 주위의 풍광과는 다르게 고단해 보인다. 바로 옆에 `반공애국지사 추모비`가 높다랗게 서서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87년 대선을 전후해서 반공주의자들의 표를 의식, 급조됐다는 비석이다. 하긴 시비가 고단해 보이는 것이 반드시 그 탓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들리는 바로는 처음에는 시비를 그가 나고 자란 부여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보소산에 세우려 했다 한다. 그것이 일부 과격한 반공주의자들의, 6.25 기간 중의 별것도 아닌 행적을 문제로 삼은 반대에 부딧쳐 부득이 지금의 자리로 나앉았다는 것이다.
생가는 시내 복판인 동남리에 있다. 한때 남의 소유가 되었던 것을 미망인 인병선 시인이 되사서 옛날의 모습을 찾아 놓았다. 복원 당시는 신동엽 시인이 살던 때 그대로 초가였으나 이제는 기와로 바뀌었다. 해마다 이엉을 새로 해 이어야 하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이 집은 아흔이 넘은 신동엽 시인의 부친 연순옹이 살면서 동네 사랑방 구실을 했다. 노옹으로부터 시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일화를 듣는 생가방문은 또 하나의 감동이었다. 옹의 작고 후 별채에 사람을 두어 관리하게 하면서 그런 감동은 없어졌지만, 순례자들의 발길은 여전히 잦다. 방명록에는 부산에서 온 문학도와 제주도에서 온 수산업자가 함께 이름을 적고 있다. 국회의원의 이름도 보이고 영화배우의 이름도 보인다. 신동엽 시인의 시적 명성이 그만큼 보편화되었다는 증좌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