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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영화에서 만나는 조난의 순간은 날카롭지만은 않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순간, 사랑에 빠진 남녀가 서로를 꼭 안고 있는 극적인 상황을 넣어 주는 것이 영화이다. 빙하에 부딪쳐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 그 절체절명의 순간, 영화는 얼음에 설탕을 쳐서 관객에게 내미는 셈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 그런 설탕은 없다. 태평양의 소금에 찌든 한 소년과 털에 윤기를 잃어 가는 호랑이가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은 순간순간 매우 야만적이다. 이 소설은 생존에 대한 소설이다. 테이블 보까지 씌운 식탁에서 일어나는 소설이 아니다. 태평양에서 파이가 상상하는 갠지스 강 분량의 콩 수프, 라자스탄만 한 따끈한 차파티는 온기가 있는 음식이지만 태평양 한가운데의 식사에는 그런 온기가 없다. 파이의 배에는 불이 있을 수 없다. 파이의 227일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다는 불 없이 버틴 시간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공포스러웠던 순간은 섬이 나오는 장면이다. 태평양 한가운데를 떠돌던 파이의 배가 닿은 섬은 신밧드의 모험을 읽는 듯한 환상과 공포를 주었다. 낯선 공포와 함께 섬뜩함과 나른함이 느껴졌다. 바다 깊은 곳에 용왕 대신 마왕이 지키고 있는 용궁에 들른 기분이다. 어쩌면 환상과 삶의 경계 지점이 그 섬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