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상정고금예문』의 편찬은 국왕인 의종의 명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려사』최윤의 전에 조를 받들어 고금상정에 50권을 찬했다.(『고려사』95 최충전 부 윤의전)
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궁금한 것은 의종이 왜 예에 관심을 가지고 『상정고금예문』의 편찬을 지시했는가 하는 점이다.
의종이 최윤의로 하여금 『상정고금예문』을 편찬토록 한 이유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사료는 없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은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전략)광종이 처음으로 백궁의 공복을 정하니, 존비 상하의 등급과 (이에 따르는) 위엄이 분명해졌다. 현종이 남신함에 미쳐 문적이 산일하여 제도와 시행을 상세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의종조에 평장사 최윤의가 조종의 헌장을 모으고 당의 제도 가운데 여러 가지를 가려서 고금예를 상정하니, 위로는 왕의 면복·여로 및 의위·로부와 아래로는 백관의 관복까지 싣지 않음이 없으니 일대의 제도가 갖추어졌다. (『고려사』 72 여복지 서문)
현종대에 걸안의 침입으로 예에 관한 문적이 산일되었기에 『상정고금예문』을 편찬했다는 위의 설명은,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예에 관한 문적이 산일되었다면, 왜 곧바로 현종대에 이의 복원작업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의종대에 ‘고금예’를 상정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일찍이 광종대에 백관의 공복을 정했는데, 이로 인해 존비 상하의 등급과 이에 따르는 위엄이 분명해졌다 한다. 그런데 최윤의가 찬정한 고금예에도 백관의 관복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었다. 백관의 관복 분만 아니라 국왕의 면복 의위 등에 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국왕의 면복 의위 등에 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백관의 공복을 정한 광종의 의도가 왕권강화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에 관해서는 신호철,「고려 광종대의 공복제정」,『고려광종연구』, 1981, pp. 82-87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