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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는 한 사회의 문화가 질적 양적으로 어떤 수준에 이르러 과거에 대한 집단적 의식이 형성될 때 생긴다. 오늘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과거에 대한 지식이 도움이 된다는 의식과 아울러 과거의 사실을 미래에 전달시켜 그 사회의 연속성을 확보하려는 의식에서 역사 기술이 생긴다. 아득한 예전에는 구전으로, 문자가 생긴 다음에는 글로 역사가 기술되었다. 한 사회 집단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은 주로 그 정치 관계이므로 역사라고 하면 으레 집단의 권력 승계의 이야기가 된다. 히브리인들의 『사사기』, 『열왕기』, 중국 사마천의 『사기』, 헬라 헤로도투스의 『역사』 등은 모두 구전되던 이야기나 문서 조각들을 잇고 보태어 일목 요연하게 기술한 역사서들이다. 과거에 역사는 모두 그런 민족, 사회, 집단의 ‘큰 이야기’였다. 훨씬 후에 가족의 역사(족보), 개인의 역사 따위가 생겼지만 한 사회의 잡다한 문물의 역사가 그 사회의 집단적 연속성의 확보에 특별히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인류 역사상 아주 짧다. 과거에 어느 사회에서 음식의 역사, 탈것의 역사, 가옥의 역사 따위에 관심이 있었던가? 나아가 시의 역사, 그림의 역사, 연극의 역사가 있었던가? 역사의 철학적 의미를 아주 낮잡아 본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연극의 형성 과정을 짤막하게 추정한 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연극의 역사의 시초이면서도 아주 오랫동안 유일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사회의 문물, 곧 문화의 다기한 산물들은 다만 변할 뿐이라는, 심하게는 무의미하게 달라질 뿐이라는 막연한 의식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