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사 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다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질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이 시는 `사슴`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시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개성적으로 표현한 시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슴의 귀족적인 품위와 고고한 아름다움에 감정을 이입시켜 `시인 내면의 근원적인 고독과 이상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고 있다. 현실의 세계보다는 어떤 먼 이상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정신적 고고함과 자기애에 빠져 버리고 있다. 현실과 타협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현실에 절망하지도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독한 자아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통해서 우리는 시인의 의식세계를 세 가지 측면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잃었던 전설’과 ‘무척높은 족속’에서 드러나는 상실의식이다. 다음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고 하는 인간 존재 또는 자아에 대한 비판적 인식 내지 고독의 문제이다. 그리고 끝으로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먼 데 산을 쳐다본다’는 과거지향적 이상향에의 동경 문제이다.
물론 『산호림』에 수록된 시 전편을 이 세 가지 의식의 범주에 완전하게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진실된 삶보다 호의가 도리만한 특종기사를 찾아야 하는 신문기자 생활의 비인간성을 질타하는 「호외」라든지 독신주의의 변으로 보이는 「말 않고 그냥 가려오」등과 같은 생활 주변의 스케치에 해당하는 작품들도 여러 편 들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편들이 위에 분류한 세 방향의 시인 의식에 통일된 또 다른 의식을 첨가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시 「사슴」의 의식세계는 시집 『산호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