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 군장국가의 유습
부여는 북쪽의 유목민족과 남쪽의 고구려 사이에 끼어 압박을 받았으므로 중국과의 연결을 통하여 국가의 유지와 왕권의 신장을 도모했다.
세습적인 국왕이 존재하고 종래의 군장들을 중앙관리로 흡수하였지만 아직도 대가들은 본래의 자기 부족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다.
① 3세기 초 簡位居의 孽子 麻余의 즉위 과정에서 “왕위세습은 적자에 한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 諸家들이 합의하여 왕을 추대”
② 부여의 옛 풍습에 물과 가뭄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잘 영글지 않으면 그 책임을 국왕에게 물어 대가들이 왕을 바꾸거나 죽이는 것을 결정
③ 제가가 따로이 四出徒를 다스려 큰 것은 수천가, 작은 것은 수백 가에 이르렀다.
④ 읍락에 豪民이 있어 下戶를 노복과 같이 다스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제가들이 스스로 싸우고 하호들은 식량을 날라다 주었다.
고구려에서는 국왕이 출현한 후에도 대가들이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두었다고 하였는데 이 대가가 곧 종래의 군장이었다. ‘那’는 이들 대가들의 독립된 군장국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고구려가 국가형태를 갖추기 전에는 이들 ‘나’라 하는 군장국가가 분립되어 있다가 계루부에서 대군장이 나오고, 다른 나들을 예속시켜 초기국가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에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가 평의하여 이를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를 노비로 삼았다는 것도 종래의 군장국가의 유풍을 나타낸 것이다.
옥저와 동예는 군장국가 가운데 가장 후진사회였다. 이 지방은 동해안에 치우쳐 있어 선진 금속문화의 영향이 적었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한군현의 분리정책과 고구려의 정치적 압박 및 경제적 수탈에 의하여 그 성장이 저지되었던 것이다. 동…
▣ 여러 나라의 성장(초기국가 ; 국왕의 출현, 일원적인 국가체제)
▣ 위씨조선도 고조선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