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들어가며]
뽀얗게 흩어지는 명랑가루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다. 언뜻 국화꽃이 수놓아져 있는 버선발도 본 듯 하다. 한 걸음 한 걸음, 황천길 문턱으로 오르는 노인의 뒷모습이 마냥 측은하지만은 않다. 풀잎에 가려 수줍게 꽃망울을 열었다가 찬비를 맞으며 작게 사그라지는 들꽃처럼 그녀의 모습은 어두운 지하로 들어간다기 보다는 다시 씨앗이 될 준비를 하러 소풍을 떠나는 것 같다.
[Part. 1 그녀를 기억하는 키워드 - 눈]
시어머니와 며느리, 엄마와 딸, 할머니와 손녀. 전혀 다른 관계의, 하지만 한 쪽이 없어지면 절대 이어질 수 없는 관계의 세 여자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서로 다른 목소리로 풀어져있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에도 바쁜 여자들은 공통적으로 ‘그녀’인 할머니의 기억으로 이어져있다.
나는 늙은이의 눈을 갖고 싶다. 바라보면서도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있는, 마른 듯하면서도 젖어있는, 간절하면서도 무심한 늙은이의 눈동자. 무엇에도 잡히지 않는 시선의 자유로움이 노인의 눈동자에는 들어 있다. 어쩌면 나는 늙은 여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세월의 고난을 거치지 않고서 곧바로 늙은 여자가 되어 세상을 비껴 보고 싶은 것이다.
- 천운영 <명랑> 본문 중 (이하 동일)
손녀는 할머니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세월과 세상에 찌들어 있는 탁한 눈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침묵의 눈. “무엇에도 잡히지 않는 시선의 자유로움”은 곧 젊은 자신이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고난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여유로움과도 같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현실은 한껏 쥐어봐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뿐인 자신에게 세월의 고난을 비껴 늙은 여자가 되고 싶…
손녀는 할머니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세월과 세상에 찌들어 있는 탁한 눈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침묵의 눈. “무엇에도 잡히지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