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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세(1283) 때부터는 인각사에 머물면서 선도(도)에 정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학의 교육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 후 84세(1289)에 입적하였고 시호를 보각이라 하였다.
일연이 살았던 시대는 온 민족이 함께 시련을 겪어야 했던 험난한 시기였다. 일연이 출생하기 전인 1xxx년부터 10년 간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 끝에 송에 대한 국교를 끊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여진족이 금(금)나라를 세운 후 거란을 치고 송을 양자강 밖으로 쫓은 후 고려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해 왔다. 당시 고려는 국제정세와 고려영토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던 여진족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중원을 지배한 몽고는 일연의 나이 26세 되던 1231년에 고려를 침입하였다. 몽고원수 살례탑은 파죽지세로 평양과 개경을 점령하더니 경기, 충원지방을 휩쓸며, 인마를 살육하는 등 전 국토를 초토화하였다. 그 이듬해 고려는 강화천도를 단행하고 몽고와 끝내 싸울 것을 결심, 1259년까지 30년 동안 항전을 지속했다. 그로인한 백성들의 고통과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특히 일연이 48세 되던 1253년의 고려사 기록을 보면 한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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