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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의 ‘first lady` 시절 (1915~1925)
1925년 손문이 북경에서 간암으로 사망하여 그녀의 결혼 생활은 겨우 10년 지속되었으며 그들의 결혼 생활 10년은 중국의 정치 생활이나 그들 부부의 생활에서도 늘 끊임없는 소요와 운동이 계속된 기간이었다.
중국 정부가 손문의 대적(大敵)인 원세개에 의해서 이끌려 가고 있을 때, 경령의 신혼 생활은 일본에서의 망명생활로 시작하게 되었고 결혼 후 경령은 손문의 통역관이자 암호 해독자이며 또한 절친한 정치적 조언자로서 일했다.
그리고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던 원세개가 1916년 6월에 죽자 손문 부부는 망명생활을 마치고 상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1917년 중반에 손문은 광동에 영입되어 총통으로 호칭되는 신공화(新共和)군정부의 우두머리로 선출되자 ‘북벌’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계획과 훌륭한 직책에도 불구하고 1918년 4월 그는 총통 칭호를 잃어버리고 5월에 은퇴하게 되었다. 그 후 2년 동안 손문은 상해에 머물렀고, 경령이 가끔씩 선명하지 않은 손문의 사상을 정리해 주며 손문 만년(晩年)에 그가 더 급진적인 위치로 가게끔 재촉해주었다. 그리고 2년 후 경령과 손문은 진형명의 초청에 다시 광동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손문이 광동을 북벌을 위한 기지로 삼아 중국을 통일하려는 시도 때문에 자기자본이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 가리라는 것을 알았던 광동의 자본가들은 손문에 대항하여 반란은 계획했고 1922년 6월 15일 군대가 손문 저택 난간에 불을 질렀다. 화염속에서 탈출하는 동안에 경령은 유산을 하게 되고, 손문부부는 상해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러시아 황제 차르가 1919년 중국에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하고 중국 공산당의 수뇌인 이대조의 제안에 의해 1922년과 1927년 제 1·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로인해 손문이 이끄…
그 후 러시아 황제 차르가 1919년 중국에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겠…